“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영어 동요로 익숙한 이 한 줄은 런던의 역사를 꽤 정확하게 압축한다. 런던 브리지는 실제로 여러 차례 무너지고 불타고 재건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리가 무너질 때마다 런던 역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런던 브리지의 시작은 로마 식민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1세기 중반, 로마인들은 템즈강의 폭이 비교적 좁아지는 지점에 론디니움(Londinium)을 건설했고, 군사 이동과 물자 교역을 위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는 북쪽의 도시와 남쪽 지역을 연결하는 관문이자, 런던이 상업도시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1750년 웨스트민스터 브리지가 완성될 때까지, 템즈강을 가로질러 런던의 남북을 잇는 주요 다리는 런던 브리지 하나뿐이었다. 수백 년 동안 런던으로 들어오는 사람도, 런던을 떠나는 사람도 대부분 이 다리를 건넜다. 런던 브리지는 길이면서 동시에 시장이었고, 도시의 입구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다.
중세 런던은 늘 토지가 부족한 도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 위의 다리마저 비워 두지 않았다. 12세기에 세워진 석조 런던 브리지에는 상점과 주택, 예배당이 들어섰다. 다리 위에 사람들이 살고 물건을 사고팔며 기도하는, 말 그대로 작은 ‘수상 도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거대한 다리를 유지하는 일은 런던 시민의 종교적·시민적 의무로 여겨졌다. 1269년 헨리 3세가 다리 통행세 가운데 일부를 왕비 엘리너에게 돌렸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몇몇 사람들은 동요에 등장하는 “My fair lady”가 바로 이 엘리너 왕비를 가리킨다고 보지만, 이는 여러 기원설 가운데 하나일 뿐 확정된 해석은 아니다.
이후 1282년, 에드워드 1세는 Bridge House Estates에 특허장을 부여하고, 다리의 소유권은 왕실에 남겨 두되 런던 시의 행정기관인 City of London Corporation이 유지·관리를 맡도록 했다. 시민들의 유언 기부, ‘신과 다리를 위하여’ 바친 헌금, 통행세와 부담금 등이 모여 다리 관리 기금이 형성되었다. 런던 시민이 선출한 두 명의 브리지 마스터(Bridge Masters)는 이 기금을 관리하고 투자했다.
13세기 말에는 이 기금이 상당한 규모로 성장했고, 1319년 에드워드 2세의 특허장은 다리의 소유권을 왕실에서 런던 시로 넘겼다. 이 결정 덕분에 런던 브리지는 이후 수세기 동안 시민 행정과 기부의 힘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시가 커질수록 다리 하나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인구와 상업이 팽창하고 남쪽 지역의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런던 브리지는 더 이상 유일한 통로일 수 없게 되었다. 1750년 웨스트민스터 브리지가 두 번째 주요 다리로 등장했고, 이후 새로운 다리들이 잇달아 세워졌다. 오늘날 템즈강에는 30여 개의 다리가 놓여 있으며, 저마다 다른 시대의 런던을 연결한다.
워털루 브리지는 영화 《애수》로 널리 알려진 다리다. 타워 브리지는 두 개의 탑과 도개교 구조로 유명하며, 사진 속에서 가장 ‘런던다운’ 모습으로 기억되는 다리이기도 하다. 웨스트민스터 브리지는 국회의사당과 웨스트민스터 사원 인근을 잇고, 밀레니엄 브리지는 세인트 폴 대성당과 템즈강 남쪽의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을 연결하는 보행자 전용 다리다.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의 오프닝에서는 어둠의 마법사들의 공격으로 밀레니엄 브리지가 무너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실제 다리는 여전히 템즈강 위에 놓여 있지만, 이 장면은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이라는 오래된 노래가 오늘날에도 런던의 불안과 변화, 파괴와 재생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런던의 다리는 단순히 강 양쪽을 잇는 구조물이 아니다. 로마의 론디니움, 중세의 상점과 예배당, 시민들이 모은 다리 관리 기금, 그리고 현대의 영화와 미술관까지 이어 주는 시간의 통로다. 템즈강 위의 다리 하나를 건널 때마다, 우리는 런던의 서로 다른 시대 위를 함께 걷고 있는 셈이다.